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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기사승인 2019.02.13  00: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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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든 앞에 글과 그림을 배운 순천 할머니들의 이야기

여자라는 이유로 혹은 가난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했던 할머니들이 또박또박 써 내려간 글씨로 풀어낸 세월 속의 깊은 이야기와 각자의 성품대로 선과 색을 대해 그려 나간 담백한 그림.
남해의 봄날이라는 정감어린 이름의 출판사를 눈 여겨 보던 중, 이 책을 접하게 되고 오랜만에 먼 곳에서 오시는 할머니를 기다리는 듯한 설레임으로 빨리 보고 싶어 조바심이 났었다.
부록으로 준다는 그림일기에도 뜬금없는 욕심이 생겨 서울에서도 책을 살 수 있는 서점들을 알아보고 주문하고 손에 받아 들고서야 안심을 하기도 하고, 이런 일에도 여유를 갖지 못하는 내가 받아 본 책은 제목 그대로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였다.

선 하나 하나를 소중히 여겨 정성껏 그린 듯한 책 표지의 그림에서부터 잔잔한 미소를 짓게 되고 읽어 나가면서는 그야말로 무장해제. 여든 앞에 글과 그림을 배운 순천 할머니들의 담담하면서도 가슴 깊이 울려오는 이야기들에 오히려 차분해지고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장독대 복숭아꽃처럼 예쁘다고 해서 어릴 때 ‘복숭아꽃’이라고 불렸다는 안안심 할머니의 이야기로, 딸이라서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고 결혼도 부모들끼리 정해진 대로 하였지만 힘들 때마다 한쪽 손이 불구라도 누구 못지않게 잘 살아내신 훌륭한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고, 호랑이 같은 시부모 밑에서 삼대독자인 남편과 자식들을 길러낸 세월을 조곤조곤 글과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다.

키는 작지만 애교가 많아 인기가 있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던 활달한 성품의 손경애 할머니 이야기는 두 번 째로 이어진다. 맘에 없는 결혼을 하고 몸이 아팠던 엄마에게 보리개떡을 쪄주지 못해서, 자식들에게는 형편이 어려워 잘해주지 못해서, 건강이 좋지 않아서 남편에게 미안했고, 치매 앓은 시어머니는 불쌍해서, 시아버지는 무서워서 늘 맘이 편치 않았던 할머니가 글을 배우게 되면서 자신감도 회복하고 건강도 회복해가는 얘기들이 다감하면서도 단정한 그림과 함께 담아져 있다.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라는 소제목의 세 번째 이야기는, 성격은 활달하고 부지런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이 취미라는 황지심 할머니와 이정순, 김영분, 김덕례, 송영순, 임순남 할머니의 지나 오면서의 꿈과 지금의 꿈에 대한 얘기들과 함께 성격이 화끈하고 나누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양순례 할머니의 이름 꾸밈과 색감이 화려하다.

네 번째 이야기는 역사의 휘용돌이 속에서 할머니들이 어린 시절을 보내며 맞았던 가족들의 때론 놀랍기도 슬프기도 미안하기도 그립기도 한 삶의 이야기들이다. 여기에서는 읽기를 멈추고 어떻게 그런 큰일들을 넘기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같이 맘 한 쪽이 무겁게 내려앉기도 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구멍 뚫린 양말 사이로 보이는 하얀 엄지발가락이 갑자기 멋있어 보여 맘이 가서,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에 믿음이 가서, 좋아하는 이와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매로 혹은 얼떨결에, 작은 아들이란 말에, 식을 못 올리고 사진만 찍고 한 결혼생활이 마치 옛 집의 마루나 안방에 걸려 있던 액자 속의 사진 풍경처럼 다가온다.
이불 홑청 주름을 편다고 장난치다가 빗자루로 때리고 생일날 밥을 빨리 안 준다고 상을 엎은 남편의 버릇을 고쳐가며 혹은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으로 정신없이 자식들을 건사하며 살아온 할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각양각색의 자식들의 얘기와 그런 자식을 대하는 할머니들의 마음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미안하고 속상하고 때로는 애닯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마지막으로 ‘학교 가는 날이 가장 행복한 날’이라는 할머니들의 배움에 대한 간절함, 글을 알지 못했을 때의 답답함, 기가 죽어 자존심이 상했던 일,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쉽게 나서지 못했던 일들로 우울하고 창피하고 부끄러웠지만 글을 배우고 공부를 하게 되고 나서 너무 기분이 좋고 행복하다는 얘기가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내려간 글씨에 소중하게 담겨 있다.

할머니들의 이야기와 그림을 다 읽고 난 후 책 뒤쪽에 그려져 있는 자화상을 다시 하나하나 살펴보니 어찌 그리 다 다르고 명료한 지 “이 분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표현하고 계신 것이 아닐 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 역시도 그 나이가 되면 이렇게 선명하게 내 모습을 그릴 수 있을까?
욕심내어 받아 둔 그림일기를 힐끔힐끔 보기만 하고 있다.

박자애 기자 myalpha @daum.net

<저작권자 © 한국여성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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