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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에서 이춘상 선생 6.20 의거 기념조형물 건립 추진회의 개회

기사승인 2019.09.02  00: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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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여 명 참석 성료

8월 31일 오후 2시에 소록도 박물관 회의실에서 “이춘상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이세용) 주관 「이춘상 선생 6.20 의거 기념조형물 건립 3차 준비모임」이 이뤄졌다.
이날 준비모임은 건립추진위의 조직안을 발표하고 추진위원의 추천을 받는 것과 건립추진위원회를 정식 발족하는 날짜와 장소를 확립하는 것으로서, 사회 각층에서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소록도>
아침 하늘은 맑았다. 먼저 소록대교를 지나고 거금대교를 건너 휴게소 옥상에서 소록도의 전체 광경을 바라보았다. 한센인들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록도는 평온해보였다. 바다 위에 길게 뜬 섬은 멀리서 보니 사람이 살고 있는 지조차 잊게 만들었다. 한때는 6천 명이 넘는 한센인이 수용됐던 섬, 죽어서도 나갈 수 없던 섬, 이제는 오백 명이 채 되지 않는 한센인 주민이 살고 있다.

소록대교가 개통한지도 어느덧 10년...
거금도휴게소에서 바라본 소록도

 

<소록도 제2성당>
아침 7시 30분에 중앙공원 앞에 있는 제2성당에서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미사참례를 했다. ‘달란트의 비유’를 든 신부님의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강론을 들으면서 ‘심은 곳에서 거두고, 뿌린 곳에서 모은다’는 말씀을 다시금 새기게 되었다.

소록도 제2성당 외관
소록도 제2성당 내부

<중앙공원>

중앙공원 이춘상 의거 안내판

회의를 앞두고 이춘상의 조형물을 건립한다면 개인적으로 그 후보지로서 어디가 좋을지 궁금하여 중앙공원을 찾았다. 중앙공원은 1936년 12월 1일 착공, 3년 4개월 동안의 공사기간을 거쳐 1940년 4월 1일 완공하고, ‘부드러운 동산’이라 불린 곳이다. 당시 산림을 깎아 만든 공원의 면적은 약 1만 9,800㎡에 달했다.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 연인원 6만여 명을 강제동원하여 조성하였으며, 득량만과 완도 및 소록도 주변 섬에서 암석을 채석하여 옮겨오고,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관상수를 반입하여 식재하였다.

공원에는 미카엘 대천사가 한센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를 적어 놓은 구라탑(求癩塔, 1963년 건립)과 한센병을 앓았던 시인 한하운(韓何雲 1920~1975)의 ‘보리피리’가 새겨진 시비(詩碑), 공덕비 2기가 있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경사지 입구에 이춘상을 기리는 작은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너는 환자들에게 너무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라고 시작하는 안내판에는 이춘상이 법정에서 ‘갱생원 부정을 일반사회에 폭로하여 환자 처우 개혁을 도모한 것을 생각하고(중략) 재원환자 6,000여 명을 구하는 길은 한 몸을 희생하여 원장을 죽이는 길밖에 없다고 여겼다.(광주지법 1심 판결문 中)’라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는 환자에 대한 가혹한 통제와 원장의 징계검속권 그리고 전시체제하 과도한 노역과 국방헌금 강요에 대한 반발로서 이 의거를 통해 환자 처우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대구복심법원과 총독부 고등법원에서 각각 항고가 기각돼 이듬해 사형이 집행되었다. 환자들은 “원장의 학정이 너무 심해 모두 그의 의거를 반기며 기뻐했다.”고 증언한다. 당시 의거가 일어났던 이곳 첫 번째 바위는 현재 원형이 사라졌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이춘상 의거에 대한 이야기는 자료관에도 전시되어 있다.

 

<한센병 박물관>

정오를 막 지난 8월의 마지막 날의 소록도는 전 지역에 걸쳐 햇볕이 제법 따사롭게 비쳤고, 마을 초입에 이르는 길에는 주로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 오고갔다.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의 모습도 보였다. 햇빛을 피해 박물관 통로 그늘에 앉아있던 주민 한 사람은 밝게 웃는 아이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예뻐! 나는 소록도를 찾아오는 어린이를 볼 때 참 좋아. 여긴 아이들을 보기가 어렵거든.” 하고 말하며,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고, 5년 전에 세 자녀에게 모든 재산을 나눠주고 다시 소록도로 들어와 살고 있는데 어느 자식 하나 찾아오지를 않는다면서 손주들이 무척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외부에서 부모를 따라온 어린아이 둘은 그의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데도 그는 아이들이 사라진 길 끝자락을 한참 바라본 뒤에 말을 이었다. “이제는 여기가 편해. 다시는 육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죽기 전에 손주들이나 한 번 볼 수 있으면……”

2016년 4월 26일, 설립 100년을 맞은 국립소록도병원이 '한센병 박물관'을 세웠다. 1916년 일제강점기 한센인의 강제 이주로 시작된 소록도의 서글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뜻깊은 공간이다.

한센병은 나병균에 감염돼 걸리는 질환으로 방치할 경우 손발이 잘려나가고 피부가 문드러져 과거 '나병'이나 '문둥병'으로 불렸다.

일제는 섬 모양이 작은 새끼 사슴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소록도(小鹿島)에 1916년 2월 24일 '자혜의원'을 설립하고 한센인 70여명을 강제로 이주시켜 학대와 감금, 강제노역 등을 일삼았다. 자혜병원은 이후 소록도 갱생원·중앙 나요양소·국립 나병원 등으로 불리다가 1982년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해안길 82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 박물관 입구
매일 09:30 - 04:30. 월요일 휴무(1월 1일, 설날/추석 연휴 휴관)
무료입장, 주차, 예약, 유아시설(놀이방), 남/녀 화장실 구분, 장애인 편의시설

<이춘상 선생 6.20 의거 기념조형물 건립 추진회의>

회의는 이세용 회장의 인사와 더불어 기념조형물 건립 취지문으로 이어졌다. 그 취지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춘상 선생 6.20의거 기념조형물 건립을 위한 취지문

“우리는 왜 1942년 6월 20일을 기억하여야만 하는가!“

조선반도 내에서 일어났던 가장 고귀한 독립 운동적이며 인권적 저항운동이었던 6,20의거는 아직까지 지하에 묻혀있습니다. 우리는 어둠의 역사에 묻혀있는 이춘상 선생의 6.20의거를 21세기 현재의 역사로 이끌어 올리기 위하여 오늘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기타가와니 와비가아리, 미와미 수호 가와루가.”(북쪽에는 미와가 있고, 남쪽에는 수호가 있다. 미와경부와 수호원장, 이 두 사람은 조선통치의 양대 근간이다.)라 일컬어지던 수호원장의 암살사건은 조선반도 내에서 일어났던 일본인 최고위직 암살사건으로서 조선독립운동사와 인권운동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춘상 선생께서 주방 원장을 죽인 사건은 원생이 원장을 죽인 것이 아니라, 폭압의 시대 조선 사람이 일본인 고위관료를 죽인 사건입니다.

1942년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기로 가마니 짜기, 벽돌 굽기, 송탄유 채취 등이 일상으로 자행 되던 시기입니다.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아야 할 갱생원에서 병약한 환자의 몸으로는 감내하기 힘든 고난과 질곡이 연속인 시기이도 하였습니다.

병원 확장공사, 어가비 건립, 수호원장의 동상건립, 신사참배, 보은감사일 시행 등, 도에 넘치는 노역은 병약한 조선인으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일상이었고, 자존심의 상처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이춘상 선생께서 조선인의 의분과 결기를 칼끝에 담아 주방 원장 가슴 깊이 찔러 넣었습니다.

1938년 8월 15일, 소록도 갱생원을 방문한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은 군복을 입은 채 황은에 감사하여야 한다면서 소록도 갱생원생들에게 가마니짜 기, 벽돌 굽기, 송탄유 채취 등을 독려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직간접적인 군수문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항에서 갱생원의 최고책임자인 주방 원장을 척살한 사건이 독립 운동이 아니면 무엇이 독립 운동이겠습니까? 식민지 백성인 동시에 한센환자로서의 이중적인 억압과 차별에 결연하게 궐기하여 주방 원장을 죽인 사건이 인권운동이 아니면 무엇이 인권 운동적이겠습니까?

작금 일본의 경제보복과 대한민국과 국가원수에 대한 무시와 결례는, 1942년이나 77년이 지난 2019년이나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던 도산 선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작금의 세계정세입니다.

2019년 8월의 마지막 날, 역사의 현장인 소록도에서 1942년 6월 20일을 기억하고, 다짐을 통해 뜻 깊은 결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역사가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회의에서는 ‘이춘상 선생 6.20 의거 기념조형물 건립위원회에서 활동할 8명의 위원이 추천되었다.

회의 참석자 기념촬영

―참석자

이세용(이춘상선생기념사업회장) 이재기(고흥군의회부의장) 서정희(소록유니복지재단 간사) 최우영(참길회운영위원장) 이우원(동학100주년기념관장) 백진앙(한벗재단이사장) 이택규(전 한벗장애인이동봉사대이사장/위이엔지대표) 조재선(의정부 직장경찰사목위원회장) 변혜민(이춘상선생기념사업회원) 김환기(다천) 남재권(국립소록도병원원생자치회장) 박성이 서판임 양숙 및 임원 外.

 

<일제 말기의 소록도 갱생원과 이춘상 사건>

1942년 6월 20일 오전 8시, 소록도갱생원의 이춘상이 원장을 살해한 사건으로, 이후 신속한 재판을 거쳐 1943년 2월 19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던 것을 말한다.

- 사건의 배경, 재판 과정에서의 본인의 진술

이 사건을 다루는 일제의 입장 등을 종합 판단할 때, 이는 나환자의 인권 투쟁이자 일제의 학정에 저항한 민족운동이었음이 명확하다. 이춘상은 소록도갱생원 운영상의 문제를 사회에 폭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판결문에 나타나는 그의 문제의식은 귀성 허가를 둘러싼 일시적 불만을 넘어서서, 갱생원의 통제 체계와 원장의 징계 검속권에 도전하는 것이었으며, 환자들에게 요구되는 과도한 노동과 전시체계가 강요하는 각종 헌금에 대한 비판에 입각하고 있었다. 또한 증언에 따르면, 꼼꼼히 운영상의 문제를 기록하면서 거사를 대비해왔다.

이 사건 이후 나타난 일본 당국의 반응에서 보듯이, 그들은 이토오 히로부미 저격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춘상은 역사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의 행위는 일제 강점 35년의 기간에 이루어진 각종 민족운동 중에서 국내에서 이루어진 최고위 식민지 관료에 대한 응징이었고, 일본에서조차 파시즘적이라고 불리는 일제 특유의 나통제 체제에 대한 파산 선고였다. 이것은 당시 제2차 대전의 와중에서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 구상에 찬물을 끼얹는 국제적 사건이었다.

이춘상 사건에 대해 일제 식민 권력이 강요한 시각으로부터 벗어나 민족 주체적으로 이를 재평가하는 것, 이것은 일반 주민들에 의해 배제되고 강제적으로 격리되었던 비인간적 존재의 인간으로의 회복이자, 그들을 민족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일이다. 이 사건을 민족운동의 맥락에 위치지우는 것은 한국 한센인들의 명예 회복과 자존심의 회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20세기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소수자를 넘어서서 사회적 타자로서 한센병력자들이 겪어온 삶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1960년대 이후 국가는 정착 사업을 통해 이들에게 '감옥으로서의 소록도'를 벗어날 수 있는 절반의 자유를 주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치적 지지를 얻어 갔다. 국가가 주지 않은 절반의 자유는 절반의 격리와 맞물려 있고, 과거의 인권 침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요구도 그 속에 들어 있다.

인권의 문제는 단지 시민사회가 국가에 대해서 제기하는 문제들뿐 아니라 사회적 타자들이 시민사회에 대해서 제기하는 과거 청산의 문제를 포함한다. 이들에게 민주화의 참된 의미는 이춘상 사건을 위시해 해방 후 발생한 한센 병력자 학살사건들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들에게 씌워진 오명을 걷어내는 일이다. 이와 함께 1960년대 이후의 정착촌 제도를 재평가하며, 노령화된 한센인들을 위한 좀 더 적극적인 복지 대책이 마련될 때, 비로소 타자는 동일자로, 인간과 시민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 위 글은 서울대 정근식 교수의 <역비논단>「일제 말기의 소록도갱생원과 이춘상 사건」을 간추린 것이다.

이택규 we-e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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