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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in Paris] ③ 고흐가 사랑했던 파리 근교 오베르

기사승인 2019.12.05  22:3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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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Vincent van Gogh)야말로 인생을 짧은 시간동안 격렬하게 자기자신과 싸우면서 외롭게 그림을 그린 비운의 작가중 하나임에 틀림없을 거다.
표현을 상징으로 언어화하였고 프랑스의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일본의 판화도 좋아해서 그의 그림 중 ‘아몬드 나무’ 등은 완전히 일본풍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그의 그림이 대중과 화단에도 부합하지 않아 동생 테오(Theo van gogh)에게 그림 재료비와 생활비를 도움 받아야 했고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신학교도 나왔던 그는 늘 소외된 자 노동자나 농민들에게 눈길을 주곤 했다. 그의 작품 중 ‘감자먹는 사람들’, ‘신발’ 등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의 맑고 순수한 영혼의 세계는 현실과 거리감이 있었고 그를 더욱 우울증에 빠지게 했다. 고갱(Paul Gauguin)만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자 초대하여 같이 그렸고 믿었던 고갱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싸운 뒤 분을 못 이겨 자기 귀를 잘랐다.

괴이한 행동을 한 후 아를의 정신병원에서 요양하다 이 동네 오베르(Auvers-Sur-Oise)로 와서 평화를 찾았다. 하지만 이것도 잠간 그가 권총으로 자기 생을 마감했다.

고흐가 그렸던 시청 건물.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는데 다른 용도로 쓰인다.

이 마을은 오래된 시청을 중심으로 성당과 조그만 레스토랑들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마을로 주변에는 드넓은 밭이 넘실되는 평화로운 전원마을이다.

자그마한 성당이지만 동네 규모에 비하면 큰 편이다. 그 당시의 그림에도 성당을 곡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가 자리 잡은 곳은 여인숙 같은 곳으로 레스토랑의 3층 다락방이었다. 한 평도 안되어 보이는, 1인용 간이침대도 겨우 들어갈까 말까한 그런 누추한 방이었다. 사진촬영은 금지이다. 직접 보니 정말 위대한 작품은 무엇이 되었든 자기 살을 깍지 않고는 탄생할 수 없다는 믿음을 재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건물 3층 다락방이 바로 고흐가 지냈던 방이다. 음식은 아래로 내려와 먹곤 했다. 지금은 2층 방을 고흐의 기념품 판매장으로 리모델링했다.
3층으로 올라가는 복도. 그 당시 그대로 보존을 기본으로 하기에 비가 새도 공사는 못하고 임시 땜질만 한다고 한다.
3층 고흐방 옆에는 영상실이 있어서 20분간 그 당시 다큐를 본다. 화면에 강하게 몰입되어 울컥 눈물이~

그 마을에서 그린 ‘까마귀 나는 밀밭’ ‘시청’ ‘성당’ 모두 낯익은 그림들이어서 반가웠지만 모네의 넉넉함과 풍성함에 비교되는 안타깝고 가엾기 짝이 없는 한없이 사랑을 주고 싶은 고흐였다.

이미 추수가 끝난 시점이라 까마귀 나는 밀밭(La champ de ble aux corbeaus)의 현장을 상상할 수밖에…

그 당시 못 받았던 사랑… 이제는 넘치게 받으니 아쉽지 않은 생이었다. 우리 마음에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생각보다 규모가 좀 큰 동네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고흐와 동생 테오.

최서현 기자 lavita55@hanmail.net

<저작권자 © 한국여성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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