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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일

기사승인 2020.05.24  1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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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퓨터를 켤 때 모니터에 비치는 주름진 자신의 얼굴을 보며 생소해서 놀란다. 그렇게 늙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마음으로 노인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늙는 것이다. 이어서 평생 해온 봉급 받는 일을 언제 그만두어야 좋을지 생각해 본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떠오른다. 외할머니는 큰방에 말없이 앉아있었다. 외갓집과 우리 집은 나란히 있었는데 우리 집에 어쩌다 오셔도 한 번도 밥을 먹지 않고 가셨다. 딸네의 양식을 축내시지 않으려고 그러셨단다. 외갓집은 잘 살지만, 우리 집은 어렵다고 헤아리셨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이 깊으셨던 외할머니가 ‘디미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노망났다’는 뜻이다. ‘노망났다’는 말은 며느리인 외숙모가 전했다. 우리 어머니는 외숙모와 나이도 비슷하고 친하게 지냈는데 외숙모의 말이 사실이라 반대는 못 하면서도 외할머니를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노망난 노인을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어린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외할머니가 노망났다고 낙인이 찍힌 이유가 있었다. 씨를 뿌려놓은 밭을 호미로 메는 것이다. 잡초를 제거한다고 메셨겠지만, 씨가 싹트기도 전에 파헤치는 것이었다.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부지런한 외할머니는 어느새 밭을 매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의 몸에 밴 습관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노망났다고 하지 말고 아예 씨를 뿌리지 않은 빈 밭을 내드렸으면 어땠을까? 외갓집은 타작마당이 있던 넓은 시골집을 떠나 대구로 이사를 갔다. 자식을 따라 도시로 이사 온 후 외할머니는 이번에는 건넌방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김을 맬 밭도 없이 집안에 갇혀 지내다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나는 궁금했다. 외할머니가 아플 때 앓는 소리는 냈을까?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아직도 궁금하고 가슴이 아프다.

이미지=CDC 홈페이지, What is Productive Aging?

 미국 대통령 레이건이 알츠하이머에 걸렸을 때 수영장의 낙엽을 쓸어서 치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치워 놓은 수영장에 밤마다 낙엽을 다시 깔아 놓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낸시 여사를 위해 즐겁게 치워주곤 했던 기억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일에서 보람을 느꼈던 기억은 중요하다. 대통령에게나 촌부에게나 삶의 기쁨이다. 노망난 노인에게도 일이 필요하다.

 언제 일을 그만두어야 할까? 현재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없을 때까지 할 것이다. 언젠가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 작은 텃밭이 딸린 시골집에서 김을 매고 채소를 기를 것이다. 죽을 때까지 일할 것이다. 나에게, 외할머니에게, 레이건에게 일이 필요했다. 남들이 필요 없다는 말을 해도 상관없다. 본인에게 필요 없는 일은 없다. 노인에게도 일이 필요하다. 노망난 노인에게도 일이 필요하다.

배명숙 특파원 msbae999@naver.com

<저작권자 © 한국여성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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