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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라 불러다오… 노인동맹단 왈우(曰愚) 강우규의 항일투쟁

기사승인 2022.11.29  22: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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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에 왜 젊은이들만 총알받이가 되는가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의사는 평남 덕천 사람이다. 함남 홍원에서 한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하던 차에 1908년 성재 이동휘(1873~1935)를 만나면서 감화되어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계몽운동을 펼쳤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1년 북간도로 망명했다. 1914년 북우(北愚) 계봉우(1880∼1959)가 왈우의 블라디보스토크 집에 2개월간 유숙하며 저술한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보고 가슴 속에 새기면서 훗날의 의거를 다짐한 것으로 전한다.

1919년 3월26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 노인동맹단’에 가입해 요하현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40세에서 70세 사이의 노인(당시 기준)들로 구성된 노인동맹단의 임무는 실전에 참여하는 청년 독립투사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왈우는 3·1운동으로 경질되는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후임으로 오는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확보한 수류탄을 숨겨 원산부로 반입했다.

1920년 9월2일, 65세의 왈우는 경성부 남대문정거장에서 사이토 마코토 신임총독의 마차에 투척하였는데 수류탄은 마부 앞 7보 떨어진 곳에서 폭발해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지만 사이토 폭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의거 직후 혼란한 군중틈을 빠져 나온 왈우는 결연한 의지로 재거사를 계획하였으나, 거사 15일 만인 9월17일 종로구 가회동 장익규의 집에서 조선인 순사 김태석에게 체포되었다. 일제의 법정에서도 꼿꼿한 기개를 보여준 왈우는 결국 사형을 언도 받고 같은해 11월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왈우가 순국하며 남긴 사세시(辭世詩)가 옛날같이 쓸쓸하다.

왈우의 남대문역 투탄의거는 3·1운동 이후 감행된 최초의 의열투쟁으로, 독립운동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노인에 의한 폭탄 투척 의거였다. (요즘으로 치면 80세 즈음으로 볼 수 있는) 65세의 노인이 항일운동 최전선에 나선 이유는 바보(愚-어리석을우)라 불러달라(曰-가로왈)는 호(曰愚)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마도 조선의 청년들에게 ‘망국’이라는 굴레를 씌운 기성세대의 어리석음을 만회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왈우의 의열투쟁정신은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흑색공포단 등으로 이어지며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박열, 조명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원심창과 같은 열혈 조선 청년들의 모범이 되었다.

 

[위] 의거 현장인 옛 서울역사 앞에는 2011년 9월2일, 왈우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아래] 국립서울현충원 순국선열 강우규의 묘(독립유공자-40). 정부에서는 왈우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변자형 기자 asadano@gmail.com

<저작권자 © 한국여성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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