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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 치욕’도 달을 희롱하며 물로 흘려보내리

기사승인 2020.08.02  15: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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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농월정(弄月亭)

용추폭포(龍秋瀑布) 심진동(尋眞洞), 수승대(搜勝臺)가 있는 원학동(猿鶴洞)과 더불어 함양땅 안의삼동(安義三洞)으로 불리는 화림동(花林洞) 화림계곡은 8정8담(八亭八潭)이라 하여 8개의 담에 8개의 정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 중에 정자는 현재 거연정(居然亭)과 군자정(君子亭), 동호정(東胡亭)과 농월정(弄月亭) 4개소만 남아 있다.

 

정자 문화의 보고 화림동에 위치한 농월정 (사진=김순조 기자)

 

화림동 계곡 하류에 자리한 농월정은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 1571~1639)가 낙향 후 지은 정자다. 

1614년(광해군6)에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가 광해군을 종용해 선조의 계비(인목왕후)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소성대비(昭聖大妃)를 유폐시키자, 박명부는 직언으로 항소하다가 파직당한 후 고향 안의로 귀향했다. 
박명부는 1623년 인조반정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참판으로 재임 중 병자호란(1636)을 당하여 남한산성에서 주전파(主戰派)로 강화(講和)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인조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굴욕을 당한 후 낙향하여 67세 때인 1637년 농월정을 완공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68세인 1638년 강릉도호부사에 제수되어 봉직하다가 이듬해 69세로 별세하였다.

농월정(弄月亭)이라는 이름은 이백(李白, 701~762)의 <고풍(古風)> 10수 시구절 ‘명월출해저’(明月出海底, 밝은 달이 바다 밑에서 나오는 것 같다)에서 따온 것으로 ‘달을 희롱하며 노는’ 풍류가 드러나 있다.

농월정 편액은 사신으로 온 명나라의 주지번(朱之蕃)이 썼다고 전한다.

농월정은 1899년을 마지막으로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보존돼왔으나 1986년 무렵 화재로 인하여 전소됐다. 2015년 9월12일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에 정자 뒤쪽 중앙 1칸에 판방(바람막이 작은방)을 둔 옛 모습대로 복원됐다. 추녀 네 귀퉁이에 활주를 세운 모습이 특이하다.

농월정 앞에 넓게 자리하고 있는 반석을 월연암(月淵岩, 달바위)이라 하는데, 그 면적이 1천여 평이나 된다고 한다. 또한 옥구슬 구르듯이 암반을 타고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달과 같이 둥글게 형성된 소(沼)를 월연담(月淵潭)이라고 부른다.

 

함양 용추계곡 내 용추폭포 (사진=김순조 기자)

변자형 기자 asadano@gmail.com

<저작권자 © 한국여성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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