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적 설명 어려운 인간 ‘잠재감각’을 다양한 상상력으로 표현
종로구 계동 배렴가옥에서 「잠재감각: Cryptesthesia」 전시회가 지난 4월 중순경부터 5월1일까지 열렸었다. 출품작가는 최하늘, 장재록, 비주얼스프롬, 태킴, 추수이다. 출품작에 관한 이규식 독립큐레이터의 글을 소개한다.
■ 「이차돈과 혁거세 Two eggs(not balls)」(2021), 최하늘
삼국시대 신라의 불교人 이차돈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모티브로 제작된 최하늘의 「이차돈과 혁거세 Two eggs(not balls)」(2021)는 역사와 허구가 뒤섞인 인물들의 기묘한 queer설화를 다룬다. 이차돈은 법흥왕 시절 불교를 공인하기 위해 자신의 육신을 희생한 불교인이다. 설화는 옥리가 그의 목을 베어 처형하자 붉은 피가 아닌 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쳐 올랐고,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등의 이적이 나타났다 전한다. 그는 비록 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그의 신념만은 더 널리 퍼지고 계승되었다. 자줏빛 알에서 태어나 탄생과 동시에 군왕으로 길러진 혁거세 신화 또한 일반적인 출생이 아닌 난생(卵生)이라는 점에서 기이한 인상을 자아낸다.
최하늘은 「이차돈과 혁거세 Two eggs(not balls)」에서 설화의 이야기를 조각하고 전시 공간에 소환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들이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나 퀴어하게 다가올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수직으로 상승하는 좌대에 나란히 놓여 있는 두 조각은 한 쌍을 이룬다. 목이 잘리는 급박한 순간임에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이차돈의 표정은 전혀 읽을 수 없다. 잘리면 증식하는 그리스 신화 속 히드라의 머리와 같이 그의 얼굴은 잘린 뒤 3개로 분열하여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재생산이라는 가치로 재단되곤 하는 ‘퀴어적 재생산’을 규명하고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우물가에 덩그러니 나타나 알을 깨고 나온 혁거세의 신화는 (부모도 없이 스스로 알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퀴어적인 재생산의 가능성을 은유하고 있다. 작가는 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적 사건들이나 인물, 사물들을 퀴어적으로 전유하고 오염시킴으로써 관람자에게 작은 의심을 유발한다. 그리고 그 작은 의심은 우리가 지금껏 인지하지 못했던 세상을 상상하게 만드는 가능성으로 작동한다.
「이차돈과 혁거세 Two eggs(not balls)」(2021), 최하늘 |
■ 「또 다른 풍경 Another Landscape」(2019-), 장재록
장재록은 「또 다른 행위 Another Act」(2019-) 시리즈에서 옅은 색의 그리드로 구분한 거대한 화면에 직접 촬영한 디지털 사진을 확대하여 픽셀 모양의 단위로 이미지를 옮겨 담는다. 그렇게 그려진 이미지는 디지털도, 현실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을 지점을 나타내고 있다. 디지털 사진, 또는 디지털이미지를 옮겨 그린다는 점에서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나 피사체, 원본 이미지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거대한 스케일로 제작된 작품은 아주 멀리서 작게 보지 않는 이상 그것의 원래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전부터 이어오고 있는 「또 다른 풍경 Another Landscape」 연작에서 작가는 한지와 먹이라는 전통적인 매체로 ‘고급 승용차, 다이아몬드, 고가의 상들리에’와 같이 구체적인 사물들로 현대인들의 욕망을 드러내 왔다. 반면, ‘또 다른 행위’ 시리즈에서는 연필로 격자 형태의 선을 그리고, 격자 속을 직접 제조한 특수 안료를 이용해 좌측 상단부터 우측 하단까지 수행적으로 채워나가며, 기술의 발달로 변화한 현대인들의 지각 방식과 인지 변환의 과정을 다루는 동시에 더욱 추상성이 가미된 형식의 작업을 지속해 나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디지털 이미지와 몹시 아날로그적이고 수행적인 행위가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무어라 명명할 수 없는 ‘중간의 지점’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지점은 우리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세계, 어떤 과정의 순간, 그리고 디지털이 현실로 현현하는 프로세스 상태이며 어디로든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이다. 작가는 이분법적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경계의 지점에 주목하며 그 속에 존재할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의 세계를 그려낸다.
「또 다른 풍경 Another Landscape」(2019-), 장재록 |
■ 「꽃부처 flower budda」(2022), 「만약 아니면 지금이, 언제?」(2022), 비주얼스프롬
비주얼스롬의 「꽃부처 flower budda」 연작은 제목 그대로 꽃과 불상이 정물처럼 촬영된 비디오 설치 작품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낡은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여 화병에 든 꽃과 작은 불상을 촬영하고, 출시된 지 10년도 지난 낡은 TV로 송출한다. 발매 당시 수백만 원에 이르렀던 TV는 이제 중고 거래플랫폼을 통해 출고가 무색해진 저렴한 가격으로 거래된다. 사진과 비디오 작업을 발표해온 작가는 지금까지 프로젝트를 통해 마주했던 것들―장소와 시간, 사람들과 장비들―을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변화하는 모습, 그리고 디지털 기기와 그것의 데이터가 낡아가는 모습(나이듦)에 주목한다. 변화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보폭을 넓히기에만 집중해온 우리에게 낡은 모니터와 저해상도의 영상은 일종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반복 재생되는 영상에서는 오직 빛과 그 빛에 반응하는(호흡하는) 꽃만이 미세하게 변화한다. 프레임 속에 함께 자리 잡은 반가사유상과 와불은 처음 보았을 때 그저 작은 소품으로 다가오지만, 사진과 혼동될 정도로 미세한 변화만이 존재하는 정물 영상을 바라보다 보면 감상자의 시선은 점차 화면을 등지고 꽃을 바라보고 있는 불상의 시선으로 옮겨간다. 산수인물화 속 풍경을 향유하는 인물에게서처럼 흐린 영상 속 불상의 신체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여 꽃을 바라볼 때,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시간 속에서 어느새 꽃은 하나의 산수가 되어 다가온다.
한편, 전시장에 위치한 텍스트 베이스의 네온 라이트 작업 「만약 아니면 지금이, 언제?」(2022)는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라며 작품을 마주하는 감상자에게 문장 그대로 강렬한 의미를 전달한다.
「꽃부처 flower budda」(2022), 「만약 아니면 지금이, 언제?」(2022), 비주얼스프롬 |
■ 「얼굴 없는 게이머」(2020-) 태 킴
온라인 환경, 특히 게임 속에서의 관계 맺기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다뤄온 태 킴은 「얼굴 없는 게이머」(2020-) 시리즈에서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게이머의 초상화를 그린다. 작가는 가상의 공간에 자신의 의지로 접속한 개인이 실체를 알 수 없는 존재와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깊게 교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인터넷의 발달로 초연결사회가 도래한 현재, 변화라는 관계의 양상을 드러낸다. 특정한 사람의 모습을 담는 초상화에서 얼굴을 알 수 없는, 더욱이 성별이나 연령대도 알지 못하는 인물을 그리는 행위는 그것이 초상화로 기능할 수 있는지 조차 의문이 들게 만든다. 사실 주지하다시피 가상 공간에서의 관계맺기는 현실과 달리 개인의 정보를 필수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작가는 게임을 통해 만난 유저들과 문자 채팅 혹은 디스코드(음성채팅)를 통해 소통하며 현실적인 조건과는 별개로 그들의 생김새를 상상하여 담아낸다.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게이머들의 초상은 인간과 게임 속 캐릭터(아바타)의 모습이 한데 뒤섞여 나타난다. 캐릭터의 외형이나 의상(스킨)을 자유롭게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는 게임처럼 인물들은 저마다 독특한 형상을 띈다. 하지만 투명한 피부 아래 그대로 드러나는 장기와 마음(心)은 껍데기를 빌려 입고 캐릭터를 움직이는 유저들이 실제로 살아 있는 유기체인 동시에 감정이 존재하는 인간임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는 ‘짤랑짤랑’, ‘NalBom’은 작가가 실제로 온라인 게임(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만난 유저들의 아이디이다. 얼굴 없는 게이머의 초상을 작가 자신을 포함한 플레이어들이 가능성으로 가득 찬 가상의 세계에서조차 승리와 패배로 나뉘는 경쟁에 자의로 참여하고 그로 인해 성취감을 느끼거나 고통받는 모습에 주목하여, 인간의 본성과 사회를 형성하는 조건들, 그리고 관계의 모습과 가능성에 관한 질문을 남긴다.
「얼굴 없는 게이머」(2020-) 태 킴 |
■ 「사이보그 선언문」(2021), 추수
추수는 「사이보그 선언문」(2021)에서 버추얼 인플루언서이자 동시에 버추얼 액티비스트이기도 한 에이미 문(Aimy Moon)을 통해 1985년 발표된 도나 J. 헤러웨이의 텍스트를 낭독한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헤러웨이의 텍스트를 낭독한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헤러웨이의 텍스트가 그 어느때보다도 디지털-가상의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세대에서 더욱 유효하다고 언급한다.(dddd, "Navigate Invisible - part 1. TZUSOO", 2022년 2월 25일, https://youtu.be/JhxKM7QDNOE)
또한 작품 속에서 인간이 아닌 가상의 인물인 에이미를 통해 텍스트가 발화된다는 점은 이미 오래전에 발표된 ‘사이보그 선언문’에 다시금 생명력과 설득력을 부여한다.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가상인간 에이미는 메타버스 플렛폼과 SNS에서 인공지능 작곡가로 활발히 활동하는 한편, 전시 공간에서는 버추얼 액티비스트로 활동한다. (대중음악씬의)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에이미는 거추장스러운 가발과 불편한 의상을 벗고 자신이 존재하는 디지털 세계에서 누구보다 자유롭게 부유하고, 심지어는 분열하고 증식한다.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예술가의 손에서 탄생한 가상인간 에이미는 인간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부모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스스로를 사생아라 지칭한다. 그는 인간의 손을 빌려 생명력을 얻고 유지해 나가면서도 역설적으로 부모-인간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낼 것을 선언한다. 에이미의 선언처럼, 사이보그는 젠더 이분법적인 상상력을 벗어나는 포스트 젠더 세계의 피조물이다. 작가의 언급대로 “여성도, 남성도, 인간도, 기계도 아닌, 인종적으로도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에이미는 빈약한 상상력으로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가상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세계 속 퀴어적 재생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생물학적 부모보다 좋은 유전적 형질로 진화-재생산하는 것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것처럼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에서, 에이미는 현실의 거추장스러운 짐을 벗어 던지고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될 것’을 선언한다.
「사이보그 선언문」(2021), 추수 |
―글: 이규식 독립큐레이터, 사진: 심규호, 사진제공: 배렴가옥
김순조 기자 dd998@naver.com